
남아시아 동부 오디샤(Odisha)의 한 작은 마을에서 자란 사띠야반과 부다는 10대 시절부터 사랑을 키워왔다. 주변의 반대 속에서도 2008년 결혼을 결심한 두 사람은 함께 삶의 고비들을 넘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어려움 앞에 마주한 부부의 현실은 가혹했다.
2014년, 사띠야반의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자 부부는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 하이데라바드 인근의 벽돌공장으로 향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한 노동 환경이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무거운 벽돌을 옮기는 데 보내야 했으며,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고용주는 무자격 ‘가짜 의사’를 고용해 비전문적인 치료를 강요했고, 한 노동자가 사망했음에도 유가족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이듬해 말, 부부는 더 나은 임금과 근로 조건을 제안받고 남부의 대형 벽돌공장으로 다시 이주했다. 하지만 약속은 곧 무너졌다. 도착한 작업장은 열악했고, 식수와 위생 시설은 부족했으며, 노동 강도는 더 심했다. 임신 중이던 부다는 하루 14시간 이상, 무거운 벽돌을 머리에 이고 스물 두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노동을 견뎌야 했다. 노동자들은 쉴 틈조차 허락받지 못했고, 감독자들은 문을 두드리며 휴식을 통제했다. 어느 날은 여성 노동자 한 명이 작업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공장주에게 삽으로 폭행당해 척추가 부러지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절망이 일상화된 그곳에서, 변화는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됐다. 2016년 3월 3일, 한 노동자가 몰래 가족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고, 이 연락은 IJM에 전달됐다. 구조 요청을 받은 IJM은 즉각 현지 당국과 협력해 구조 작전에 돌입했고, 총 564명의 강제노동 피해자를 구출할 수 있었다. 구출된 사람들 사이에는 사띠야반과 부다도 있었고, 이 작전은 IJM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구출작전이었다.
사띠야반은 그날의 기억을 “진정한 자유를 느낀 순간”으로 회상한다. 공포에 물든 벽돌공장을 떠나 자유를 향해 걸어 나왔던 그날, 부부는 마침내 긴 억압의 사슬을 끊어냈다.

이후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와 IJM의 사후관리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지붕과 타일을 제작하고,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며 자립의 기반을 다졌고, 이 과정에서 아들 아카시를 출산했다. 많은 생존자들이 조용히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사띠야반은 자신의 고통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해방된 생존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 채무노동 생존자 연합회 (RBLA, Released Bonded Laborer’ s Association)의 리더가 되었고, 이후 지역사회의 인권 교육과 권리 옹호 활동에 헌신하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IJM의 긴급 구호 코디네이터로도 활동했다.
“저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하면 반드시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사띠야반은 그렇게, 고통 속에서도 연대와 희망을 선택한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사띠야반과 부다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개인의 생존담을 넘어선다. 이는 억압과 착취에 맞서 스스로 삶의 주체로 일어선 한 부부의 회복과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며 동시에 오늘날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자유와 정의를 기다리는 수많은 생존자들의 현실을 대변한다. 이들의 여정은 우리가 인권 침해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책임 있는 연대와 행동을 통해 지속 가능한 변화를 만들어가야 함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남아시아 동부 오디샤(Odisha)의 한 작은 마을에서 자란 사띠야반과 부다는 10대 시절부터 사랑을 키워왔다. 주변의 반대 속에서도 2008년 결혼을 결심한 두 사람은 함께 삶의 고비들을 넘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어려움 앞에 마주한 부부의 현실은 가혹했다.
2014년, 사띠야반의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자 부부는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 하이데라바드 인근의 벽돌공장으로 향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한 노동 환경이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무거운 벽돌을 옮기는 데 보내야 했으며,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고용주는 무자격 ‘가짜 의사’를 고용해 비전문적인 치료를 강요했고, 한 노동자가 사망했음에도 유가족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이듬해 말, 부부는 더 나은 임금과 근로 조건을 제안받고 남부의 대형 벽돌공장으로 다시 이주했다. 하지만 약속은 곧 무너졌다. 도착한 작업장은 열악했고, 식수와 위생 시설은 부족했으며, 노동 강도는 더 심했다. 임신 중이던 부다는 하루 14시간 이상, 무거운 벽돌을 머리에 이고 스물 두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노동을 견뎌야 했다. 노동자들은 쉴 틈조차 허락받지 못했고, 감독자들은 문을 두드리며 휴식을 통제했다. 어느 날은 여성 노동자 한 명이 작업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공장주에게 삽으로 폭행당해 척추가 부러지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절망이 일상화된 그곳에서, 변화는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됐다. 2016년 3월 3일, 한 노동자가 몰래 가족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고, 이 연락은 IJM에 전달됐다. 구조 요청을 받은 IJM은 즉각 현지 당국과 협력해 구조 작전에 돌입했고, 총 564명의 강제노동 피해자를 구출할 수 있었다. 구출된 사람들 사이에는 사띠야반과 부다도 있었고, 이 작전은 IJM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구출작전이었다.
사띠야반은 그날의 기억을 “진정한 자유를 느낀 순간”으로 회상한다. 공포에 물든 벽돌공장을 떠나 자유를 향해 걸어 나왔던 그날, 부부는 마침내 긴 억압의 사슬을 끊어냈다.
이후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와 IJM의 사후관리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지붕과 타일을 제작하고,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며 자립의 기반을 다졌고, 이 과정에서 아들 아카시를 출산했다. 많은 생존자들이 조용히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사띠야반은 자신의 고통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해방된 생존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 채무노동 생존자 연합회 (RBLA, Released Bonded Laborer’ s Association)의 리더가 되었고, 이후 지역사회의 인권 교육과 권리 옹호 활동에 헌신하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IJM의 긴급 구호 코디네이터로도 활동했다.
“저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하면 반드시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사띠야반은 그렇게, 고통 속에서도 연대와 희망을 선택한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사띠야반과 부다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개인의 생존담을 넘어선다. 이는 억압과 착취에 맞서 스스로 삶의 주체로 일어선 한 부부의 회복과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며 동시에 오늘날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자유와 정의를 기다리는 수많은 생존자들의 현실을 대변한다. 이들의 여정은 우리가 인권 침해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책임 있는 연대와 행동을 통해 지속 가능한 변화를 만들어가야 함을 다시금 일깨워준다.